공중 예배를 중심으로 살핀 ‘유스 디비눔’의 교회정치
공중 예배를 중심으로 살핀 ‘유스 디비눔’의 교회정치
Church government in the ‘Jus Divinum Regiminis Ecclesiastici’ that focuses on Publick worship
– 장대선(가마산 장로교회)
Ⅰ. 서론
종교개혁의 시대 이후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장로교회 신학의 가장 기초적인 바탕은 성경이다. 기적과 신비를 더욱 추종하며 신뢰하는 현대적인 기독교 신앙의 분위기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고 말씀하셨을 만큼, 성경은 신앙과 생활에서 하나님에 관해서와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깨달을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다. 그러므로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우리에게는 우리를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로 정확하게 인도할만한 훌륭한 조력자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빛을 더하시어, 그 말씀으로써 구원을 깨닫도록 하신 것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21)고 했으며, 아울러 “하나님께서 동일한 방식으로 자신에 대한 순수한 지식 안에 우리를 고정시켜 두시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고하게 서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까지도 넘어지기가 쉽기 때문이다”22)라고 했다. 바로 그러한 일관된 맥락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2항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모두가 “신앙과 생활의 준칙으로 있도록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졌다”고 명시하고 있다.23)
특히 인상적인 것은 칼뱅이 기독교강요에서 성경의 필요를 언급하는 맥락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1항의 요지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는 점이다.24) 그러므로 누가복음 16장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칼뱅이 기독교강요에서 말하는 창조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안내자로서의 성경의 필요, 그리고 칼뱅에 의해 초안된 프랑스 신앙고백 제2-4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1항이 동일한 맥락으로 일관되게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신앙고백의 맥락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성경에 관한 일관된 필요와 강조는 그대로 예배모범에도 투영되는데, 장로교회들의 표준적인 예배지침인 웨스트민스터 공예배 지침서(예배 모범)는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예배에 관한 전반적인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즉 장로교회들의 표준적인 예배지침은 성경에 명시적으로(Explicitly) 혹은 암시적으로(Implicitly) 제시되어 있는 것에 근거한다. 바로 그러한 근거에 관한 원리가 바로 예배의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다. 예배의 규정적 원리야말로 오직 성경에만 근거하는 신학으로서의 실천적 원리이며, 바로 그러한 맥락이 성경에 근거하는 웨스트민스터 공예배 지침의 기초인 것이다.
그러나 미국연합장로교회(PCUSA)에서 1967년에 발표한 신앙고백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주로 북미대륙을 중심으로 하여 현대의 장로교회들 가운데 다수는 이미 규정적 원리와 같은 예배의 원리에서 이탈해 있다, 무엇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2항의 “신앙과 생활의 준칙으로” 주어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이탈했다. 특히 미국연합장로교회의 1967년 신앙고백 제2장 성령의 교제(the Communion of Holy Spirit)에 관한 항목 중 2항에서 다루고 있는 성경에 대한 입장을 보면, 한국 사회의 장로교회들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경에 대한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게 된다. 1967년 미국연합장로교회 신앙고백 제2장 2항은 다음과 같다.25)
하나님의 유일 충족한 계시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다. 그에 대하여 성령은 성서를 통하여 유일하고 권위 있는 증거를 한다. 성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락되고 복종을 받는다. 성서는 다른 여러 증거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비길 데가 없는 증거이다. 교회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책들을 예언적이며 사도적인 증거로 수락하였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리고 그것에 의하여 교회의 믿음과 복종은 함양되고 규정된다.
신약성서는 나사렛 예수 곧 메시아의 내림과 교회에 성령을 보내신 일에 대하여 증거한 사도들의 증거의 기록이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과의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성실하셨다는 것을 증거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될 것을 지적해 준다. 구약성서는 신약성서를 이해하는데 없지 못할 책이며, 또 그 자체는 신약성서가 없으면 충분히 이해될 수 없는 책이다.
성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화해 사업에 대한 증거에 비추어서 해석되어야 한다. 성서는 성령의 인도 아래서 주어진 것이지만 역시 사람들의 말이며, 그것들이 기록된 장소와 시대의 언어, 사상형식, 문학형태들의 지배를 받는다. 성서는 그 당시에 유행하던 인생관, 역사관, 우주관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문학적 역사적 이해를 가지고 성서에 접근할 의무가 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로 다른 문화적 정황 속에서 그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그가 또한 변천하는 세계에서 그리고 인간문화의 모든 형태 속에서 성서를 통하여 계속 말씀하시리라는 것을 교회는 확신한다.
성령의 비침에 의지해서 성서가 성실하게 선포되고 주의 깊게 읽으며, 그것의 진리와 지시를 지체 없이 받아들이는 곳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도 그의 교회에 주어진다.
이 같은 1967년 미국연합장로교회 신앙고백의 성경에 대한 이해를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문구는 “성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화해 사업에 대한 증거에 비추어서 해석되어야 한다. 성서는 성령의 인도 아래서 주어진 것이지만 역시 사람들의 말이며, 그것들이 기록된 장소와 시대의 언어, 사상형식, 문학형태들의 지배를 받는다. 성서는 그 당시에 유행하던 인생관, 역사관, 우주관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문학적 역사적 이해를 가지고 성서에 접근할 의무가 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로 다른 문화적 정황 속에서 그의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그가 또한 변천하는 세계에서 그리고 인간문화의 모든 형태 속에서 성서를 통하여 계속 말씀하시리라는 것을 교회는 확신한다.”고 하는 문구다. 즉 성경은 항구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기록된 장소와 시대의 언어, 사상형식, 문학형태들의 지배를 받”을 뿐 아니라, 그런 만큼 하나님께서는 “변천하는 세계에서 그리고 인간문화의 모든 형태 속에서 성서를 통하여 계속 말씀”하실 것이라고 보는 것이 1967년 미국연합장로교회가 표방한 성경에 대한 입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1967년 미국연합장로교회가 표방한 신앙고백의 성경에 대한 입장은 이미 그보다 앞서 1788년 미국 미국장로교회에서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수정본으로부터도 발견할 수 있다. 즉 제31장 1항의 “더 나은 치리와 건덕을 위해 일반적으로 공의회 혹은 회의라고 불리는 모임이 있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우기 위해 개교회의 감독자와 그 외의 치리자들에게 부여하신 직무와 권한으로써, 그러한 치리회들을 정하는 것(행 15장)과, 그들이 그러한 치리회들이 교회에 유익하다고 판단될 때에, 그러한 치리회를 위해 종종 함께 모이는 것(행 15:22, 23, 25)이 그들의 직무다.”26)는 문구에서부터 성경에 명백한 위정자(관원)에 의한 역할과 관련한 내용27)을 간과하고 삭제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선례는 나중에 1967년 미국 연합장로교회 신앙고백의 사례에서 다시 적용되는데, 1967년 신앙고백에서 명시하고 있는 역사적 신앙고백과 교리문답들의 목록에서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이 삭제되는데 근거가 되는 선례로 작용한 것이다.28)
사실 1967년 미국연합장로교회 신앙고백의 작성을 주도한 것은 미국 북장로교회였다.29) 이미 미국 북장로교회는 1903년도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수정작업도 주도했었다. 이때에도 1967년 미국 연합장로교회 신앙고백서 작성의 경우와 같이 성경에 내포된 교리를 받지 않고 복음만을 받는 입장이었으니, 로저스는 “1967년 신앙고백의 성경에 관한 최종적인 선언은 위원회의 원래적인 초안과 세심한 정치적 협상을 거친 다음에 마련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한하여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지칭을 유지하였으며, 이것을 믿는 사람이면 성경에 적용해도 좋다고 하였다.”30)고 언급하고 있다. 계속해서 로저스는 “1967년 신앙고백의 원래적인 형태는 ‘한 분 하나님의 충분한 계시자는 예수 그리스도로서, 그는 성육신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이 여러 방법으로 증언한다.’로 되어 있다. 성경에 대하여는 ‘이 계시에 대한 규범적 증언이다.’로 되어 있다. 개정된 신앙고백은, ‘한 분 하나님의 충분한 계시자는 예수 그리스도로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은 성경을 통하여 유일하고 그리고 권위 있는 증언을 하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순종한다.’로 되어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1967년 신앙고백의 맥락은 이미 1903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수정 때에 교리를 받지 않고 복음만을 받는 입장을 그대로 따른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1967년 신앙고백의 “초안위원회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칭할 때에는 대문자 W31)를 사용하고, 성경을 언급할 때에는 소문자 w32)를 사용하는 구별을 유지하였다.”고 로저스는 설명한다. 바로 이러한 성경에 대한 이해의 바탕에서 1903년과 1967년, 특히 1967년 미국 연합장로교회의 신앙고백 제2장 2항의 성경에 대한 고백과 최종적으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대한 이탈이 진전된 것이다.
결국 웨스트민스터 총회 이전까지 장로교회들의 역사와 다르게 웨스트민스터 총회 이후로, 특별히 북미대륙에서 장로교회가 시작될 때에 그 시작에서부터 그 이전까지의 맥락과 달리 기존의 신앙고백과 신학을 시대 여건에 맞추어 수정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33) 그러므로 장로교회의 신학과 그 실천으로서의 예배와 관련하여, 그 중심적인 지침과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기준점을 두고 있으며,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2항의 “신앙과 생활의 준칙으로 있도록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졌다”고 한 문구를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것이냐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지침과 근거가 웨스트민스터 총회 가운데서 얼마나 일관되게 지지되었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시대의 예배와 관련하여 얼마나 잘 적용되고 있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Ⅱ.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신학적 입장
일반적으로 장로교회의 표준문서라 불리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들(신앙고백서, 대소교리문답, 장로교회 정치형태(교회정치 모범), 공예배 지침(예배 모범) 등)은 장기의회(Long Parliament)를 배경으로 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의 정치적 문제와 종교 문제가 얽혀있는 가운데서 산출된 유산이라고 보는 견해들이 있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들 가운데 예배 지침서의 경우에 그러한 정치적 배경 가운데서 산출된 것으로 파악하곤 한다. 그러므로 장로교회 정치형태와 예배의 지침들은 당시의 시대와 정치적인 배경을 이해해야만 그 정확한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고 전제되는 것을 볼 수 있다.34)
R. Letham에 따르면 “스코틀랜드에서는 교회가 활기 넘치고 부유했던 반면 뚜렷한 정치(세속정치)적 중심 기구가 없었”고, 반면에 잉글랜드에서 “의회는 활기 넘치고 부유했기 때문에 왕과도 싸웠으나 교회는 해체된 상태였다”고 한다.35) 그러므로 런던에서 이뤄진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잉글랜드 교회 자체에 의해 소집된 것이 아니라, 의회의 소집과 통제 가운데서 이뤄졌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에라스투스파(Erastian) 성격의 기구였음을 말하면서36), “스코틀랜드 교회는 미개한 잉글랜드 교회가 열망했었을 법한 개혁적으로 정확한 교회의 모범은 아니었다.”37)고 했다. 무엇보다도 Letham은 엄숙동맹의 언약 1조의 “하나님의 말씀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모범을 따라서” 라고 하는 문구에 대한 논쟁을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를 제한적으로, 즉 스코틀랜드 교회의 관행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한에서만 그래야 할 것인지, 아니면 스코틀랜드 교회 규율이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에 따른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을 시인하는 것이냐는 점이었다. Letham은 딕스훈(Chad B. Van Dixhoorn)의 “Reforming the Reformation”, (Cambridge, 2004)을 인용하면서, 그에 대해 “나의 양심상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것으로 생각하는 한”이라는 의미로 결정되었음을 밝히면서, 이를 바탕으로 “적어도 (당시의) 많은 신학자가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어느 부분이 성경과 일치하는지에 대해 상당한 수준에서 불확신 혹은 회의를 품고 있었다.”고 설명한다.38)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관한 Letham의 입장 가운데 다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은 “이 총회의 문서들은 타협의 문서들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39)는 주장이다. “150명의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에서, 타협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그의 입장40)은, 당시 민감한 주제였던 교회 정치의 문제에 있어 독립파와 1658년에 사보이 선언을 작성한 회중파(John Owen이 주도)가 공히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표준문서 중 실천적인 부분인 교회 정치에 대한 부분을 따르지 않은 사실41)과 상당부분 반대되며,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가운데 있는 교회 정치에 있어서의 확고한 장로정치의 입장을 퇴색시키는 주장인 것이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표준문서들이 지지하고 있는 보편적인 입장은, 모든 문구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충실하는 것을 명시하고 있으며, ‘유스 디비눔’의 논문에서는 그러한 입장이 더욱 상세하게 작성되었음을 파악해 볼 수가 있다. 아울러 교회 정치에 관해서도 표준문서와 유스 디비눔의 정리는 확고하다. 그러므로 유스 디비눔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와 그 유산들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의 현대적 의미와 가치에 대한 확고한 근거를 제시한다. 즉 “교회정치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로 인해 수많은 연약하고 불안정한 사람들을 혼란스러운 사고와 우유부단함의 미궁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데에 확실히 기여하는 것이다.
사실 당시에 세속정치에 있어서는 왕당파와 의회파, 교회정치에 있어서는 로마 가톨릭교회(아일랜드), 잉글랜드 국교회, 독립교회(O. Cromwell을 비롯한 의회파 군대), 장로교회(스코틀랜드 총대들과 일부 잉글랜드 총대들)의 여러 교회정치 형태를 배경으로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소집되었을지라도, 모든 판단과 결론은 그러한 정치적 배경 가운데서의 타협과 절충의 결과보다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근거하는 ‘신학적 결론’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42) 정치적인 상황변화에 민감했었던 의회와는 별도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있어서는 교회정치에 따른 다양한 입장의 차이를 극복하고 타당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성경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해석에 따른 신학의 결론에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43)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표준문서들, 그 가운데서도 공예배에 관한 지침(예배모범)은 주로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에서 정리된 신학의 바탕을 전제로 이해되어야한다.44) 즉 웨스트민스터 총회 자체는 당시의 세속정치와 교회정치 형태의 다양한 영향과 작용 가운데 있었을지라도, 그와는 별도로 표준문서들 자체는 순전히 성경에 근거하는 타당한 신학적 결론에 따른 것으로서 그 고유의 가치가 있다.45) 바로 그러한 맥락 가운데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이해할 때에, ‘유스 디비눔’(Jus Divinum Regiminis Ecclesiastici)은 그러한 이해에 있어 가장 직접적이며 명확한 이해를 제공하는 점에서 반드시 살펴볼만 한 중요한 웨스트민스터 총회와 관련한 자료다.
1. 유스 디비눔(Jus Divinum Regiminis Ecclesiastici) 작성의 배경
유스 디비눔과 관련한 자료들을 추적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인터넷을 활용하여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관련한 문서들과 자료들을 수집함으로써 광범위하게 다뤄볼 수는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국내에서 이 논문의 존재 자체조차 보편적이지 못한 실정이다. 무엇보다 1646년에 출판된 자료는 편집에 있어 일관성이나 규칙이 다소 미흡한 부분이 많으며,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부분이 많아 판독하기가 상당히 곤란하다. 그런 가운데 미국의 납달리 출판사(Naphtali Press, Dalls)에서 1995년에 David W. Hall 목사의 본문 정리와 함께 간단한 전후 사정(context)을 소개한 자료가 출간된 것이 있을 뿐이다.46)
Hall에 따르면,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모였을 때, 시작부터 주장된 교회 정치의 몇 가지 명백한 긴장 상황들이 존재했다. W.K. Lamont는 총회 이전에 심지어 감독제주의자들이 신적 권리/법(jure divino)라는 한 정체(고위성직자직)를 주장했다고 한다. 총회에 참석해서 고위성직자 형태의 정체를 옹호하도록 위임받은 몇몇 잉글랜드 국교도가 있었다. 그러나 찰스 1세(King Charles I)가 총회를 탄핵하고 금지한 후(1643년 6월 22일) 결코 많은 사람이 참석하지는 못했다. 온건한 감독제주의자들은 아일랜드의 대감독 제임스 어셔(Irish Archbishop James Ussher)가 별칭 감독(Bishop)으로 지명된(1560년 스코틀랜드 규정서 Book of Discipline에 나오는 ‘감독’[superintendents]과 유사한) 한 직무상의 대회 회장과 함께 ‘원시 감독제도’ 또는 근본 장로제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옹호했다.47) 또한 숫자상 소수의 대표라는 점이 John Selden이나 ‘랍비’ Coleman이나 John Lightfoot와 같은 훌륭한 의회 회원으로서의 그와 같은 전형들의 고매함을 절대로 감소시키지는 않았을지라도, (문관행정장관에게 위임된 그 나라의 열쇠들을 완전히 갖춘 하나의 국교인 정부교회를 믿는) 에라스투스주의자들(Erastians)은 수적으로 몇 명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에라스투스주의는 그 개혁된 공동체 안에서 결코 많은 사람을 설득시키지는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 G. Gillespie는 “에라스투스주의는 순수하게 아버지에게서 내려진 것에 대한 존경이 없습니다. 에라스투스주의의 아버지는 옛 뱀입니다. 에라스투스주의의 어머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해서는 우리의 본성(nature)을 거스르는 적의(敵意)입니다. 이러한 불행한 한 배 새끼를 세상의 빛 가운데로 데려온 산파(産婆)는 토마스 에라스투스(Thomas Erastus)였습니다. 에라스투스주의의 오류가 출생되는 중에 그 오류에게 젖을 먹인 가슴은 신성모독이고 사리사욕이었습니다. 그 오류가 성장해 나가는 중에, 그것이 먹은 강력한 음식은 전횡적인 정부였습니다. 그 오류를 돌본 정성스런 교사는 아르미니우스주의였습니다.”48)라고 에라스투스주의에 대해 강력하게 논박했다.
Hall은 계속해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지배적인 그룹은 장로제주의 회원이었다. 그 산출물들 즉 신앙고백서(the Confession)와 교회정치 지침서(the Directory for Church Government)와 공예배 지침서(the Directory for Public Worship)가 명백히 입증하기 때문이다. 영국 제도(British Isles)의 상황 내에서 1647년쯤에 장로제 정치형태가 성경적인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 그렇게 승승장구했었다는 사실은 인상적이다. 1647년보다 이전에 100년 동안 장로제주의자들이 이루어낸 수사학적인 설득의 정도는 훨씬 더 놀랍다. 장로제주의자들은 교회 정치에 대한 논쟁에서 이겼음이 분명하다. 즉 다수를 납득시키고 전향시키는 논쟁 그리고 처음에는 강점이 없었던 그 논쟁에서 이겼다.”49)고 말한다. 아울러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독립교회제주의자들이 가장 도전적이고 시간을 낭비하는 논쟁들의 원인이 되었다. 비록 독립교회제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신학적인 지향 면에서 개혁되었을지라도, 이 그룹은 장로제주의자들이 옹호하는 강력한 연대주의(connectionalism)를 지지하지 않았다. 로마주의자(anti-Romanist)와 감독주의(anti-prelatic, anti-bishop) 양쪽 모두에 반대하는 독립교회주의자들과 장로주의자들은 신앙과 삶의 여러 면에서 일치되곤 했다. 하지만 중요한 정치적 논점들에서 그들은 근본적으로 일치하지 않았다. 독립교회주의자들은 재주 있는 논쟁자들이었으며 의지가 강했다. 그래서 빈번히 그 총회의 인내를 시험했다. 총회 참석자 Baillie는 독립교회주의자들이 “정말 말을 많이 하고 아주 잘한다.”고 기록했다. Baillie는 또한 “독립교회주의자들, 즉 우리를 대단히 저지시키는 자들”이라고 기록했다. 아울러 “독립교회주의자들은 자기 지역의 20 마일 내에 들어오는 모든 일들을 너무 장황하게 논쟁하는 의사 방해자들”이라고 진술했다. 나중에 Baillie(와 다른 사람들)은 총회에서 충분히 논의하기도 전에 대중에게 자신들의 답변서 (변론적 서술 The Apologetical Narration)를 발표한 것 때문에 독립교회주의자들의 가르침과 방책들에 대해 강력히 반대를 표명하곤 했다. 그들의 지나치게 민중적인 경향과 교회의 권위를 그저 조언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점은 그 총회의 대다수와 1640년대 런던의 장로주의자들에 의해 비난을 받았다. 따라서 장로주의는 막대한 영향의 중심에 있는 1640년대에 비국교도들 사이에서 지배적이었다.”50)고 한다. Hall의 설명에 따르면 “웨스트민스터 총회 회의 이전에, (스코틀랜드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의 14개 주에서 온 793명 이상의 성직자들이 엄숙동맹을 맺었다. 케임브리지에서 온 카트라이트의 많은 제자들이 그 총회에서 그 성직자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런던의 도시에는 장로제주의의 개종자들로 구성된 특별히 소리를 내는 인기 있는 그룹이 있었다. 게다가 랭커셔(Lancashire)에서 장로교회 정치가 1644년 12월 17일 의회의 법령에 의해 채택되었다. 그 의회의 법령은 랭커셔 주의 장로제주의의 계율/안수식을 고려하였으며, 나중에 한 장로회가 1646년 10월 2일에 설립됐다. 이처럼 초기 역사는 그 총회 기간에 런던에 있는 60명의 목사들 중에 단지 한두 명만이 장로주의자가 아니었다고 증언한다. 1643년에 의회에 의해 고위성직자제가 폐지됨에 따라서, 런던은 1646년쯤에 공식적인 역할을 하는 장로회의 설립에 서명했다. 교회법상, 런던지역은 각 지역이 대략 12-15개의 교회들을 가진 채로 12개의 장로회로 구획분할 되었다. 영국의 이 장로제주의 체제에서, 런던 장로회들은 치리 장로들이 목사들로서 두 차례 비례 대표를 유지한 채로 12명의 목사들로 구성되어야 했다. 웨스트민스터에서의 회합 이후로 1659년까지, 이 공식적인 역할을 하는 장로회들은 일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 모여서 교회를 개혁하고 그 나라를 확장할 방법들을 모색했다. 그러므로 1647년(5월 3일과 12월 14일)에 런던 지방 대회의 첫 번째 회의와 두 번째 회의는 각각 목사 위원의 16표차로 웨스트민스터 성직자들에 대한 증인으로서 서명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목사들 중에 몇몇 목사는 지방 런던 목사들이었고, 다른 목사들은 자신들의 임기 동안에 웨스트민스터에서 수많은 런던 설교목사들 안에서 조력하고 설교했으며, 그 목사들 중에 68명은, 즉 151명의 본 목사들 중에 약 20-30명 정도가 결코 참석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실제 참석자들 중에 절반 이상에 해당되는 그 68명의 목사들은 장로주의로 교회적인 영예를 얻은 케임브리지의 졸업자들이었다. 장로제주의를 채택한 런던 장로제주의자들과 케임브리지 졸업자들 전체는 그 총회에게 처음부터 장로주의자들에 대한 기분 좋고, 시종일관 아무도 이길 수 없는 득표차를 제공했다. 그러한 득표는 절대로 주저하는 양상을 보이지 않았고, 선거권 행사와 관련하여 어떠한 위협을 받지도 않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Herbert Palmer, Anthony Tuckney, John Arrowsmith, Richard Vines, Thomas Gataker, Simoeon Ashe, Edmund Calamy, Stephen Marshall, (나중에 런던 대회의 첫 번째 대회 의장이 된) William Gouge, (런던 대회의 첫 번째 서기인) Lazarus Seaman, Matthew Newcomen과 같은 케임브리지에서 교육받은 타협할 줄 모르는 지도자들과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 총회에서 승리를 거두어 장로주의의 깃발을 가져왔다. 의심할 것 없이, 독립교회주의자들은 Jeremiah Burroughs, Thomas Goodwin, 그리고 Phillip Nye라는 유능하고 헌신하는 대변인들이 있었지만, 결국에 긴 논쟁 후에, 장로주의자들은 그 총회에 의해 채택된 교회학적인 결론들에서 우세했다. 만일 칼빈주의적 독립교회주의자들이 그 총회에 참석하였는가? 또한 그들은 독립교회주의/조합 교회주의를 옹호하였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 이다. 그런데 그 질문이 그들의 독립교회주의의 관점이 신앙고백, 교리문답, 공예배 지침서 또는 교회정치 규칙서 안에 채택되었는가? 라는 것이라면, 그 때의 대답은 한결같이 분명하게 ‘아니다’ 이다. 독립교회주의/조합 교회주의의 견해는 그 총회에서 — 구두로, 숫자상 ‘아니오’ 인 경우로 — 기술되었지만, 소수의 견해였으며, 웨스트민스터 표준들에 의해 채택되지 못한 견해였다.”고 설명한다.
Hall에 따르면 이 문서(유스 디비눔)는 “1646 년에 성경에 의해 입증되고, 입증된 교회 기구의 신적인 권리에 관한 철저한 장로교 원칙의 진술이 “Jus Divinum Regiminis Ecclesiastici”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것”인데, 인쇄업자 Joseph Hunscot과 George Calvert가 런던에서 출판한 이 익명의 연구는 “런던 시내의 그리스도의 여러 목사들”(Sundry Ministers of Christ within the City of London)이라는 익명의 제목으로 작성한 것이다. Hall은 아마도 이 문서가 웨스트민스터 총회 자체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동조자들에 의해 작성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이 문서에서 밝히고 있는 교회론으로 볼 때에, 이 문서의 작성자들은 에라스투스주의자(Erastians)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문서의 작성은 분명 장로교인들에 의한 것임이 분명하다. 다만 이 문서의 작성자들이 밝혀져 있지 않은 것은, 당시 의회에서 처음에 의회에 제출되었던 에라스투스주의의 입장 이외에 일체의 다른 출판물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51) 의회는 총회가 장로교회 정치형태를 지지하고 발표하는 것을 철저히 방해했는데, 1646년 4월 30일 총회에 “아홉 가지 질문들(Nine Queries)”이라 불리는 에라스투스주의 문서를 발송하여 논의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런던 시의 장로교도들은 개별적으로 장로교회 정치를 표방하는 “Jus Divinum Regiminis Ecclesiastici”라는 제목의 문서를 별도로 작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서는 의회에 의해 에라스투스주의가 강압된 분위기 가운데서도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입장이 무엇이었는지를 훨씬 직접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다. 반면에 정치적 압박 때문에 신앙 고백과 지침(모범)들은 교회정치에 대한 핵심 주제에 있어서 본래의 의도 또는 진실한 입장들이 상당히 수정된 버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52)
한편, 공예배 지침이 다른 교파와의 대화와 절충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성경에 근거하는 예배가 무엇인지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을 신앙고백(제21장 “경건한 예배와 안식일에 관해”, 22장 “합당한 맹세와 서원에 관해”, 24장 “결혼과 이혼”, 25장 “교회”, 26장 “성도의 교통”, 27장 “성례”, 28장 “세례”, 29장 “성만찬”)과 대소교리문답에서 일부 살펴볼 수 있는 것과 달리, 장로교회 정치형태에 관한 지침들이 성경에 근거하는 유일한 교회정치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유스 디비눔’(Jus Divinum Regiminis Ecclesiastici)에서 극명하게 파악된다.53) 즉 장로교회의 정치형태와 그 가운데서의 예배에 대한 지침들은 독립교회파나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정치와 예배의 규정들을 일부 절충한 것이거나, 교회 회중과 사역자들의 필요에 의해 약정된 교회정치와 예배의 형태가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유일하고도 합당한 원리로 처음부터 결론지은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54) 특히 스코틀랜드의 목회자들(총대)이 아니라 잉글랜드(런던)의 목회자들 가운데서, 장로교회 정치형태가 하나님의 신적권위(Divine Right)에 근거하는 명백하고도 유일한 것임이 천명되어 있다는 점에서 웨스트민스터 총회 자체의 장로교회에 대한 입장과 지지가 명백하게 정리되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유스 디비눔의 서문은 밝히기를 “이 논문에는 하나님의 법(Jus Divinum), 즉 신적권위(Divine Right)의 특성에 관하여 명확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즉 신적권위가 무엇이며, 어떤 대상이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성경을 따라 신적권위를 부여받았는지에 대하여 기술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논문을 통해 신적권위를 가장 명확히 지닌 것으로 보이고, (다른 모든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가장 일치하고 부합하는 것으로 보이는 교회정치에 대해서 분명하고도 친절하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 교회정치에 대한 기술(교회정치의 전체적인 구조와 제도를 포함하는)은 성경의 증언과 성경을 통한 논증들로 세분화하여 설명하고 확증할 것입니다.”라고 한 것이다.
2. 유스 디비눔(Jus Divinum Regiminis Ecclesiastici)에 관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의 논의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당시에 회의가 목적했던 원래의 목적은, 잉글랜드 교회의 정치(government)를 개혁하는 것과 더불어 예배(liturgy)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회의의 첫 논의와 산출물이 “공예배 지침서(1645)”와 “장로교회 정치형태와 목회자 임직에 관한 법령(1645)”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그러한 개혁을 바탕으로 교회의 교리를 확고하게 하고 교리적인 일탈과 거짓들로부터 변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던 것이다.55)
한편, 1643년 7월 1일에 열린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처음에 잉글랜드 국교회의 39개 신조를 개정하고자 하는 논의로 시작되었다가 대대적인 개정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들은 잉글랜드의 상·하원의 긴밀한 주도 가운데서 이뤄졌다.
그런데 1646년 여름부터 신앙고백서의 작성을 지체시키는 일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원에서 돌출적으로 제시된 주제들에 관한 웨스트민스터 총회 성직자들과 혹은 의회 사이에서의 의견차이 때문이었다. 즉 교회의 직원들이 권징으로써 성도의 교제를 막을 권한이 있는가하는 문제와, 유스 디비눔(Jus Divinum)에 관한 하원의 질의에 대한 답변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웨스트민스터 총회 성직자들 사이의 의견차이가 신앙고백서의 작성을 지연시키는 중요한 이슈로 제기되었던 것이다. 특별히 유스 디비눔(Jus Divinum)에 관한 논의가 중요하게 대두되었는데, 1646년 4월 30일에 있었던 631번째 회의에서부터 제기된 유스 디비눔에 관한 논의는 같은 해 5월부터 집중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여 7월까지에 대두되었던 가장 중요한 논의주제였다.56)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비공식적으로 유스 디비눔(Jus Divinum)에 관해 논의되었던 것인데, 이 논의는 하원이 1646년 7월 22일에 있었던 677번째 회의 때에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의 완성을 서두르라고 우회적으로 지시함으로써 중단되었다.57) 그러므로 그동안 이 주제를 논의했던 저자들의 유스 디비눔(Jus Divinum Regiminis Ecclesiastici)의 논문은 비공식적으로 작성하여 출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David W. Hall의 이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웨스트민스터 총회 회의록, 그리고 A. F. Mitchell의 설명 등을 종합하여 볼 때에, 유스 디비눔(Jus Divinum Regiminis Ecclesiastici)이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장로정치를 지지하는 목회자들에 의해 논의되어 작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당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장로정치를 지지하는 목회자들의 입장이 장로정치를 하나님의 법(Jus Divinum), 즉 신적권위(Divine Right) 가운데서 지지하고 표명하는 것이었음을 분명히 할 수가 있다. 즉 장로정치에 대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입장은 수용적이었거나 중도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장로정치가 신적권위를 지닌 유일한 교회정치로서의 하나님의 법으로 제정된 것이라는 입장이었음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장로정치에 근거하며 연계되는 성격으로 언급되어 있는 것이 바로 공적 예배에 관한 주제임을 알 수 있다.
3. 유스 디비눔(Jus Divinum Regiminis Ecclesiastici)으로서의 공적 예배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전반적인 취지가 타협적이었거나 절충안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류임을 알게 하는 또 다른 유산인 유스 디비눔(Jus Divinum Regiminis Ecclesiastici)은, 파트 1의 제2장에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법(Jus Divinum), 즉 신적권위(Divine Right)의 특성”58)이 무엇인지를 언급한다. 그 가운데 “신적보증과 권위의 인치심을 받았다고 성경으로 입증할 수 있는 교회정치와 관련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능력과 권위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임명을 통해서 교회정치를 위한 신적권위를 부여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다(마 28:18-20, 사 9:6; 요 5:22; 엡 1:22)”59)고 한 것을 볼 수 있는데, 특히 “1. 하나님의 법은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의 모든 권세와 피조된 모든 권위를 초월하며 이들과 구별된다. 하나님의 법(Jus Divinum)은 최고이자 최선의 지위를 가지며, 이를 통해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리·예배·정치를 유지할 수 있다”60)고 하면서,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마음에서 고안된 것이거나 타인의 유전(Traditions)에서 유래한 것이거나 인간이 만든 모든 것들은 신적권위와 양립할 수 없고 모순되며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헛된 것이며 그것들을 사용하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에게 정죄를 받을 뿐이다(왕상 12:32-33; 사 29:4; 마 15:6-9 참고)”라고 하여, 교회정치뿐만 아니라 교리와 예배에 관한 것들 또한 하나님의 법으로서의 분명한 권위로 성경에 제시되어 있음을 확증한다. 더욱이 “2. 그리스도의 교회의 신적권위를 폐지하거나 신적권위의 정당한 이행을 반대하는 것은 인간이나 피조된 권세가 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이다. 신적권위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며, 이를 반박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될 뿐이다”라고 하여 그 엄중함과 필연성을 말하고 있다.
한편, 유스 디비눔은 파트 1의 제4장에서 “성경에 나오는 의무적으로 따라야 하는 모범들을 통해 부여된 신적권위”61)를 말한다. 먼저 “성경의 의무적인 모범(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모범을 반드시 지키고 따라야 한다)을 통해 어떤 대상에 신적권위가 부여된다. 종교문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지정에 따라 신적권위를 지니게 됐다.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그러한 모범들이 성경에 기록되었고 그 모범을 따르도록 성도들에게 제시됐다. 이때 자연의 빛은 다소 도움을 준다.62) 하지만 성경의 의무적인 모범들의 빛은 훨씬 많은 도움을 준다. 이 빛은 더 분명하고 구별되며 구체적이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따라서 유스 디비눔은 “성경의 모범들만 무오하고 공평한 하나님의 손길로 제시되었다”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아울러 성경의 모범들로써 “Ⅰ. 하나님의 모범”과 “Ⅱ. 그리스도의 모범”63), 그리고 “Ⅲ. 선지자, 사도, 성도, 초대교회들의 모범”64)을 제시한다.
이제 유스 디비눔의 파트 Ⅱ에서는 본격적으로 성경에 따라 신적권위를 부여받은 교회정치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다루는데, 제7장에서는 “교회 내에서 행사되는 교회정치의 권세의 다양한 부분이나 행위들”65)이라는 제목으로 “명령이나 교리의 열쇠와 관련된 규례들”66)을 다루는데,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공예배지침(예배모범)의 내용들이다. 제7장에서 다루는 규례들은 1. 공적인 기도와 감사, 2. 시편의 찬양, 3.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공적사역, 4. 성례의 집행이다. 즉 웨스트민스터 공예배지침(예배모범)의 내용들을 개괄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67)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유스 디비눔은 그 근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공적인 기도와 감사는 신적인 규례들이다.68)
“공적”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공적인 예배 가운데서의 기도와 감사는 신자의 자율에 의해 임의로 시행하는 성격이 아니라 신적인 규례로서 시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적인 기도와 감사는 신적인 규례들임을 밝히면서 이르기를 “(1) 바울은 디모데전서를 기록하면서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딤전 3:14-15)라는 지시를 우리에게 내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딤전 2:1-3을 인용하고 있다. 또한 “(2)사도바울은 모임에서 공적기도를 할 때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라고 규제하고 있고, 공적기도는 그리스도의 규례임을 당연시 한다(고전 14:14-17)”고 했는데, 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1장 3항의 “만일 소리를 내어 기도하려고 한다면, 알 수 있는 말로 해야 한다(고전 14:14)”69)는 내용과 유사하다. 특별히 “(3) 이외에도 사도는 공적기도를, 접대하는 일과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고 실제로 그들의 목회적인 직분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고 기도와 말씀사역에 전념한다(행 6:4)”고, 아울러 “(4) 예수 그리스도는 공적기도에 대하여 은혜의 약속, 즉 자신의 이름으로 모인 자들과 함께하시고 저들의 기도를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 18:19-20)”고 하면서 “공적기도가 자신이 정한 규례가 아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공적기도의 지위를 그토록 높였겠는가?” 하고 물음으로써 확신을 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1장 3항은 서두에 “감사함으로 드리는 기도는 경건한 예배에 속하는 하나의 특별한 요소”라고 언급한다.
이처럼 공적인 기도와 감사가 예배에 있어서의 신적인 규례이므로, 웨스트민스터 공예배지침에서도 “설교 전의 공적인 기도”와 “설교 후의 기도”에 관련하여 구체적인 기도의 내용을 수개하고 있다.
2) 시편의 찬양은 신적인 규례들이다.70)
웨스트민스터 공예배지침에서 언급하는 찬송은 시편찬송이 유일하다. 마찬가지로 유스 디비눔에서도 오직 시편의 찬양만을 언급하고 있는데, 특별히 시편을 부르는 것은 “신적인 규례”라고 했다. 그 이유는 먼저 시편의 찬양은 성경에 “(1)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성경본문으로 엡 5:18-19과 골 3:16을 언급하고 있는데, 두 본문에서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란 시편찬송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유스 디비눔과 웨스트민스터 공예배지침의 공통된 입장이다.71)
또한 시편의 찬양이 성경에 “(2) 규제되어 있다”고 언급한다. 즉 성경에는 “찬양의 적절한 방식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고전 14:15-16에 따라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는 것이며, 또한 골 3:16에 이른 것과 같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아울러 엡 5:16의 말씀과 같이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는 것이다. 이러한 규례 외에 다른 규례는 없다.
3)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공적사역.72)
교회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의 공적 사역과 관련하여 유스 디비눔은 “성경봉독이나 설교나 문답식이든 상관없이 말씀사역은 신성한 규례”라고 말한다.
먼저 “말씀의 공적인 봉독”이 신적인 규례인 이유는, 신 31:11-13; 렙 36:6; 골 3:16 말씀에서 볼 수 있는바 “하나님은 공적으로 말씀을 봉독하라고 명하셨고 그 이후로 이 명령을 절대로 철회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출 24:7; 느 8:18, 9:3, 13:1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성경의 공적인 봉독은 그리스도 이전에도 하나님의 교회의 관습이었으며, 행 13:15, 27, 15:21; 고후 3:14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 이후로도 그러했다. 그러므로 신 31:11-13에서 알 수 있는바, 성경의 공적인 봉독은 늘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필수적이고 유익한 일이다.
두 번째로 “말씀의 공적인 설교는 그리스도의 유명한 규례다.” 그 이유는 막 3:14, 16:15; 마 10:7, 28:19-20; 딤후 4:1-2; 고전 1:17, 9:16-17; 행 20:28; 벧전 5:1-4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을 전파할 것을 명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롬 10:15; 딤전 3:2-8; 딛 1:5-9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누가 말씀을 전해야 하는지를 정하셨으며, 딤후 4:2; 딛 1:9; 렘 23:28에서 볼 수 있는바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이 어떻게 전파되어야 하는지를 정하셨다. 뿐만 아니라 마 16:19, 18:18, 28:20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규례가 아니라면 전파되지 않았을 자신의 말씀을 전파하도록 격려의 약속을 자주 하셨다.
세 번째로 “말씀을 교리문답식으로 전하거나 설명하는 일, 즉 하나님의 명령들의 주요한 원리들을 명백하고 알기 쉽게 전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이는 히 6:1-2; 고전 3:13에서 알 수 있듯이, 사도들이 처음 교회를 세울 때 교회를 가르치는 사도적인 방식이었으며, 갈 6:6에서 알 수 있듯이 목사와 성도들 상호간의 관계와 직무를 설명할 때 성령님이 사용하시는 우회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4) 성례의 집행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73)
이는 요 1:33; 마 28:18-20에서 세례에 관해, 고전 11:20-23; 마 26:26-31; 막 14:22-27; 눅 22:19-20에서 성만찬에 관해 기록하고 있는 성경본문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유스 디비눔 파트 Ⅱ의 제7장의 “교회 내에서 행사되는 교회정치의 권세의 다양한 부분이나 행위들”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유스 디비눔은 예배에 관련한 “명령이나 교리의 열쇠와 관련된 규례들”만을 다루지 않고 “재판이나 치리의 열쇠와 관련된 규례들”을 함께 연계하여 다루고 있다. 이는 교회정치와 공적인 예배, 그리고 교회의 운영 등이 유기적으로 연계되는 것임을 나타내 주는 특징이다. 즉 “1. 기도와 금식을 한 후 장로의 회에서 안수를 하고 장로들을 임명하는 일, 2.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교리에 대한 권위 있는 분별과 판결하는 일, 3. 죄인들을 훈계하고 공적으로 책망하는 일, 4. 악하고 교정되지 않는 자들이 교회의 성찬식에 참여하지 못하게 이들을 거부하거나 내쫓는 일, 5.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며 위로하고 권위 있게 교회의 교통 속으로 다시 확증하는 일, 6. 교회의 지체들 중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의 궁핍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특별히 보살피는 일”74)은 교회정치에 해당할 뿐 아니라, 공적인 예배와 교회의 운영에 긴밀히 연계되어 있는 신적규례들인 것이다.
Ⅲ. 결론
장로교회의 정치형태에 대한 이해와 실천은 ‘비가시적인 교회’가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 즉 교회의 표지(sign)인 ‘치리’(혹은 권징)에 연계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즉 하나님의 택하심 가운데서의 비가시적이며 우주적인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인 성경에 충실한 말씀 선포와 그에 따른 성례의 시행, 그리고 성경에 근거하는 교회정치(Jure Divino)로서의 장로교회 정치형태와 그 실행인 치리(권징)를 통해 가시적으로 지상에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적인 예배뿐 아니라 성경에 근거하는 교회 정치로서의 장로교회 정치의 실현은 교회의 가시성에 있어 필연적이다.
이와 관련하여 ‘유스 디비눔’은 파트 1의 제1장에서 “성경은 신약시대의 가시적인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신적권위가 부여된 정치가 있었음을 선언한다.”고 말하면서, “이 사실은 고전 12:28절에 명확히 드러나 있다”고 했다.75) 아울러 제2장에서 “신적보증과 권위의 인치심을 받았다고 성경으로 입증할 수 있는 교회정치와 관련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능력과 권위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임명을 통해서 교회정치를 위한 신적권위를 부여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다(마 28:18-20, 사 9:6; 요 5:22; 엡 1:22)”고 했다. 또한 제3장에서 “구체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법(Jus Divinum), 즉 신적권위(Divine Right)의 특성”에 관해 말하면서, “결과적으로, 현재 논의 중인 교회정치문제에서 자연의 참된 빛에 부합하는 것은 신적권위를 부여받은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정의한다. 무엇보다 “성경의 의무적인 모범(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모범을 반드시 지키고 따라야한다). 종교문제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지정에 따라 신적권위를 지니게 됐다.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그러한 모범들이 성경에 기록되었고 그 모범을 따르도록 성도들에게 제시됐다. 이때 자연의 빛은 다소 도움을 준다. 하지만 성경의 의무적인 모범들의 빛은 훨씬 많은 도움을 준다. 이 빛은 더 분명하고 구별되며 구체적이기 때문이다”고 하여 자연(본성)의 빛을 훨씬 능가하는 성경의 모범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러므로 “성경의 모범들만 무오하고 공평한 하나님의 손길로 제시되었다”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스 디비눔’은 성경에 구속력을 지닌 모범들이 제시되어 있음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모범, 그리스도의 모범, 신약시대 그리스도인들(선지자, 사도, 성도, 초대교회들)의 모범에 이르는 세 가지를 제시한다. 즉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범들 외에 어떤 구속력도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 특별히 파트 Ⅱ의 제6장에서 “(1) 교회 정치의 권세를 계시하고 규제하는 것은 국가정책의 원칙이나 의회의 공문서도 아니고 도시나 지방, 왕국, 제국을 다스리는 장치인 인간이 만든 성문법, 법, 규례, 칙령, 법령, 전통, 인간의 계율이 아니라 영적인 규범, 즉 완전한 하나님의 경전인 성경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성경 속에 자신의 집인 교회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딤전 3:14-5) 그리고 그리스도의 모든 규례, 말씀, 성례전, 책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딤후 3:16-7, 4장 참고) 충분히 계시하셨다……(2) 교회 정치의 권세는 그 근원이자 저자 안에서 영적이다. 이 권세는 세상의 통치자나 왕, 혹은 지배자에게서 나오지 않고 세상의 어떠한 인간에게서나 뜻에서도 나오지 않으며 오직 우리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76)고 하여, 로마 가톨릭교회나 에라스투스주의, 회중주의 및 그 어떤 세속적 권위나 뜻에서가 아니라 앞서 언급한 성경 안에서 구속력을 지닌 세 가지 모범들(하나님의 모범, 그리스도의 모범,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에 의해서 단일하고 일관된 교회정치로서 장로교회 정치형태가 제시되어 있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또한 유스 디비눔은 파트Ⅱ의 제7장에서 “교회 내에서 행사되는 교회정치의 권세의 다양한 부분이나 행위들”이라는 제목으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이하의 규례들이 자신의 교회에서 지속적이고 영원하도록 제정하시고 지정하셨다.”77)고 하면서 “Ⅰ. 명령이나 교리의 열쇠.”에 대한 설명에서 그와 관련된 열쇠와 규례들로 1. 공적인 기도와 감사, 2. 시편의 찬양, 3.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공적사역, 4. 성례의 집행이 각각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신적인 규례임을 밝힌다.78)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교회정치의 표준뿐 아니라 공예배모범 또한 근본적으로 신적인 규례로서의 모범을 명시하고 있는 성격이다.79) 아울러 “Ⅱ. 재판이나 치리의 열쇠와 관련된 규례들.”에 대한 설명 가운데서 1. 기도와 금식을 한 후 장로의 회에서 안수를 하고 장로들을 임명하는 일, 2.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교리에 대한 권위 있는 분별과 판결, 3. 죄인들을 훈계하고 공적으로 책망하는 일, 4. 악하고 교정되지 않는 자들이 교회의 성찬식에 참여하지 못하게 이들을 거부하거나 내쫓는 일, 5.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며 위로하고 권위 있게 교회의 교통 속으로 다시 확증하는 일, 6. 교회의 지체들 중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의 궁핍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특별히 보살피는 일 등이 모두 신적인 규례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경의 입장에서 신앙고백이나 대소교리문답 뿐만 아니라 교회정치와 예배모범 등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모든 표준문서들을 이해하여, 현대의 교회들에도 항구적으로, 무엇보다 유일하게80)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유스 디비눔은 교리의 내용들뿐 아니라 공예배지침(모범)과 장로교회 정치형태에 대한 문서들까지 모든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표준문서들이, 하나님의 법(Jus Divinum), 즉 신적권위(Divine Right)로서 항구적으로(perpetual) 부여되어 있는 것임을 충분하게 논증하고 있으며, 따라서 교회의 표지인 말씀선포와 성례, 그리고 치리(권징) 모두가 신적권위를 부여받은 하나님의 법으로서 시행되도록 하는 것이 유스 디비눔으로서의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의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장로교회들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교회의 표준으로 채택할 때에 항상 이러한 성격을 이해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야 한다. 그 점에서 이미 1788년 미국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수정, 1903년과 최종적으로 1967년도 미국 연합장로교회의 새로운 신앙고백서 작성의 역사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있어서의 장로교회정치와 예배의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 등에 담긴 하나님의 법으로서의 교회정치에 근본적으로 역행하는 역사였던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장로교회들이 그러한 북미대륙에서의 역사를 따라가는 한 그것은 결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바탕으로 하는 장로교회의 정치가 아니며, 그러한 장로교회정치가 없는 교회는 결코 장로교회일 수 없음을 인식하고 개혁해야 한다. 바로 그런 점에서 유스 디비눔(Jus Divinum Regiminis Ecclesiastici)의 문서는 성경이 규정하는 교회가 장로교회임을 확고하게, 그리고 더욱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규례들을 설명하고 있다.
Notes:
21)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Vol I, trans. Ford L. Battle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0), 6. 69.
22) Calvin, Institutes, I, 6. 70.
23) 정성호,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들』, (서울: 개혁주의성경연구소, 2018), 51.
24) 뿐만 아니라 칼뱅이 초안한 것으로 알려진 프랑스 신앙고백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1항과 2항의 내용과 거의 유사하게 제2조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다음과 같이 계시하셨다. 첫째는 그분이 행하신 일들과 창조, 만물의 보존과 통치를 통해서, 둘째는 더 분명하게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다. 처음에는 직접 말씀하셨으나 나중에는 우리가 성경이라 부르는 책들에 (그것을) 기록하게 하셨다.”고 했고, 제3조의 경우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2항과 거의 유사한 성경 목록을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 나열한 뒤, 제4조에서 “우리는 이 책들이 정경으로서 우리 신앙의 확실한 규범이라는 것을 안다”고 언급한 것을 볼 수 있다. 장대선, 『프랑스 신앙고백 해설』, (서울: 세움북스, 2017), 406-7.
25) 1967년 미국연합장로교회 신앙고백의 한글번역은 미국연합장로교대한선교회 편, 『신앙고백집』,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968), 257.의 인용이다.
26) “For the better Government, and farther edification of the Church; there ought to be such Assemblies as are commonly called Synods or Councils. and it belongeth to the overseers and other rulers of the particular churches, by virtue of their office, and the power which Christ hath given them for edification, and not for destruction, to appoint such assemblies; and to convene together in them, as often as they shall judge it expedient for the good of the church.”
27) 이는 1647년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1장 1항과 2항을 함께 묶으면서 삭제한 것인데, 1647년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1장 2항은 “관원이 종교적인 문제에 관하여 자문을 구하거나 논의하기 위해 목사와 그 외에 적절한 자들로 구성된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명시가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증거본문 “사 49:23, 딤전 2:1-2, 대하 19:8-11, 29-30장, 마 2:4-5, 잠 11:14” 등을 수록하고 있어서, 교회에 대한 관원의 역할이 적절하게 있는 것이 성경에 명시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28) Jack Rogers, Presbyterian Creeds, A Guide to The Book of Confessions, 차종순 역, 『장로교 신조: 신앙고백 안내서』,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5), 224-5 참조.
29) Jack Rogers, 『장로교 신조: 신앙고백 안내서』, 223.
30) Jack Rogers, 『장로교 신조: 신앙고백 안내서』, 236-7.
31) “Word of God”
32) “word of God”
33) 이와는 다르게 16세기 종교개혁자들과 17세기 개혁신학자들의 일관된 신학적 입장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을 비롯하여 그 이전까지의 신학의 맥락을 정확히 찾아 계승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므로 프랑스 위그노들의 신앙고백인 프랑스 신앙고백(1559)은 로마 가톨릭신학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의 성격이 아니라 원래의 바르고 참된 신학을 계승하는 취지였고, 그러한 기본적인 성격이 심지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까지 이어져 있다. 일례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트렌트 공의회 제3차 회기(1546)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의 문구에 대한 계승과 제4차 회기 제1교령의 정경 목록(G. Alberigo, J.A. Dossetti, P.P. Joannou, C. Leonnardi, and P. P개야, in consultation with H. Jedin, Conciliorum Oecumenicorum Ⅲ, 김영국, 손희송, 이경상 역, 『보편 공의회 문헌집 제3권 -트렌토 공의회·제1차 바티칸 공의회-』 (서울: 가톨릭출판사, 2006), 662-4 참조) 과 거의 유사하게 프랑스 신앙고백 제6조와 3조(장대선, 『프랑스 신앙고백 해설』(서울: 세움북스, 2017), 406-7 참조)에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프랑스 신앙고백은 트렌트 공의회의 내용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하여 정통적인 신경들과 성경에 대한 입장이 무엇인지를 천명하고 있는 점에서 구별이 있다. 반면에 북미대륙에서 1788년 이후로 있었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수정과, 최종적으로 1967년 미국 연합장로교회 신앙고백에 이르러서는 성경에 근거하는 올바른 입장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맞춘 수정과 변경이 있을 뿐이었다.
34) R. Letham은 “이 총회의 문서들은 타협의 문서들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150명의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에서, 타협은 불가피한 일이다. 비록 아미로주의(Amyraldianism)에 관한 문제뿐만 아니라, 이 총회가 거짓된 것으로 간주한 것(반율법주의자들, 아르미니우스파, 로마 가톨릭, 루터파, 고교회 감독파) 등의 독특한 신조들과 장로파와 독립파 사이의 교회론에 대한 잘 알려진 차이점들도 이 총회가 배제한 것을 우리가 고려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수용 가능한 교리로 여겨졌던 것 내에도 분명한 차이점, 뉘앙스, 형세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Robert Letham, The Westminster Assembly. Reading its Theology in Historical Context, 권태경·채천석 역,『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2014, 개혁주의신학사), 191 참조. 그러나 Jack Rogers는 이러한 분위기는 웨스트민스터 총회 말미(1648년)에 이르러서의 현상이었음을 기록한다. 즉1648년 3월 총회에 참여했던 잉글랜드의 장로교 목사 Edward Reynilds가 밝히는 당시의 정황과 관련하여 기록하기를 “회의는 3년 여의 수고를 거쳐서 신앙고백이 작성된 다음에 1646년 12월에 국회로 넘겼었다. 상원은 1647년 2월에 이를 통과시키고서 하원에게도 뜻을 같이해 줄 것을 부탁했었다. 스코틀랜드 대표위원도 이것을 본국으로 가지고 가서 1647년 8월 27일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에서 스코틀랜드 교회의 신앙고백을 대치시키게까지 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하원은 한 문장 한 문장 지루하게 입씨름하고 있다. 이들은 하원의 요구에 따라서 성직자들이 첨가시킨 성경적 증거 구절들을 문제시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시간을 끄는 사이에 Oliver Cromwell과 그의 군대는 의사당의 숨결을 느끼고서, 매일같이 정치적인 영향력을 과시했으며, 이러한 영향력을 증대시켜서 국회로부터 장로교인들을 숙청시키고 독립교회파 회중교도들(Independent Congregationalist)로 대치시켰다. 그 때에 이르러서 Reynilds는 하원의 숫자가 100여명으로 줄어들고, 그 사람들도 대다수 크롬웰의 영향력 아래 있는 독립교회파임을 알았다.” Jack Rogers,『장로교 신조: 신앙고백 안내서』, 165-6. 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Letham의 설명은 바로 이러한 시기에 해당하는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Rogers에 따르면 당시 국회에는 30명의 국회의원들과 3명의 에라스투스주의자들이 있었는데, 국회 내에서 상당수가 에라스투스주의를 지지했다고 한다. 앞의 책 173 참조. 무엇보다 David W. Hall은 “첫 번째 엘리자베스 여왕의 전복 시도가 있은 후 단지 반세기만에(1587년 토마스 카트라이트 Thomas Cartwright의 규범서 Book of Discipline 출간),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소집되었을 때, 그 총회는 열정적이고 신념이 있는 장로제주의자들로 채워졌다. 어떻게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났었는가? 신념의 정복(ideological conquest)은 비교적 짧은 양의 시간에 매우 불리한 여건 아래서 이루어졌었다. 모든 면에서 탁월한 그 신학자들 즉 성경적인 사람들은 성경을 신실하게 해석하므로 그 논쟁에서 이겼다. 단지 뜻밖에도 (오히려 독립조합 교회제주의를 지지하는) 크롬웰 Cromwell이 장로제주의 교사들의 전면적인 주도권을 방해할 때까지는 장로제주의 교사들이 그 날을 압도하여 우세했을 정도였다.” David W. Hall, Jus Divinum Regiminis Ecclesiastici or The Divine Right of Church Government (Dallas: Naphtali Press, 1995), 12. 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분위기는 이미 장로교의 분위기였음이 분명하다.
35) Robert Letham,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 75.
36) 그러나 유스 디비눔이 에라스투스주의를 논박한 성격인 길레스피(George Gillespie)의 “아론의 싹난 지팡이”(Aron’s Blossoming; Or, The Divine Ordinance of Church-Government Vindicated)를 인용하면서 논증하는 부분들과 파트 Ⅱ의 제9장에서 다루는 교회정치와 세속 권세의 독특한 성격에 대한 기술들로 볼 때에, 이는 Letham 자신만의 단언으로 보인다.
37) 앞의 책, 76.
38) 앞의 책, 76-7 참조.
39) 앞의 책, 191.
40) 이러한 그의 논지는 그의 책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 87쪽의 결론과 모순된다. 즉 그는 잉글랜드의 장로파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 “장로파는 비타협적이었으며……만일 그들에게 적절한 재치가 있었다면 장로교를 잉글랜드 국교회로 만들었을 것이며 독립파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용했더라면 군대(크롬웰의 군대)의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라는 설명과 모순을 이루는 견해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그 성립 목적을 자기 나라에서 달성하지 못했다.”고 한 88쪽의 결론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신학적 결론을 도출한 잉글랜드의 장로파의 입장이 결코 타협적이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유스 디비눔 파트 Ⅱ의 제9장에서 에라스투스주의자(Erastian)들을 논박한 점, 그리고 제10장에서 주로 브라운주의(Brownists) 혹은 독립교회주의자(independents)들의 ‘신자들의 모임’(the coetus fidelium)에 근거하는 주장들을 논박한 점에서 타당하지 않음을 파악할 수 있다.
41) 이 사실은 당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모든 논의들에 대해 신학적으로 순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부분인 교회정치의 형태에 대해서는 별개로 치달은 것을 시사한다. 즉 그들은 모두는 성경에서 인출되는 유일한 신학의 내용에 동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만 각자의 교회정치의 형태를 여전히 고수하고자 했었던 것이다.
42) 반 딕스훈(Chad B. Van Dixhoorn)의 조사에 따르면, 1643년부터 1652년까지의 1,333회의 전체회의, 209회의 특별 위원회, 출간된 원고 162권을 면밀히 분석하여 조사한 결과 전체 회의의 26%와 특별 위원회의 19%만이 교회 정치를 초점으로 하는 것이었으며, 전체 회의의 36%와 특별 위원회의 31%가 신학적인 문제들에 할애되었을 만큼 신학에 주력했었던 것이 총회의 전체적인 방향이었다고 한다. Robert Letham,『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 182-3 참조. 즉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표준문서들의 관점은 교파논쟁이 아니라 항상 신학에 있었으며, 그러한 신학은 또한 성경에 대한 올바른 접근과 해석 가운데서 인출되는 것이었기에, 단순히 총대들의 견해와 입장이 아니라, 성경이 규정하는 원리로서의 결론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43) 당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성경적 결론과는 별도로 상원과 하원의 승인과정에서 상당부분, 특히 제30장의 “교회의 권징”, 제31장의 “대회들과 회의들”, 그리고 제20장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항목들을 일부 삭제하거나 수정하는 식으로 하고, 제목 또한 “양원에 의해 승인되고 통과된 기독교신앙의 조항들”(ARTICLE of Christan Religion, Approved and Passed by both Houses of PARLIAMENT, After Advice had with the Assembly of DIVINES by Authority of Parliament sitting at Westminster. London:…June 27, 1648)이라는 제목으로 통과시켰다. Peter Toon, 양낙흥 역,『청교도와 칼빈주의』(서울: CLC, 2009), 95-6. 정성호,『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들 번역 후기(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작성 과정을 중심으로)』(2018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여름강좌와 가족 프로그램), 31-2 재인용.
44) 1643년에 ‘엄숙 동맹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이 체결되었을 때에, 가장 큰 지침은 “하나님의 말씀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모범을 따라” 단일한 종교개혁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엄숙 동맹의 언약 첫 항에서 “우리는 우리 공동의 원수들에 맞서서 ‘교리와 예배와 권징과 교회정치’에 있어서 스코틀랜드 교회에 담긴 ‘개혁된 신앙’의 보존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모범을 따라(가장 잘 개혁된 교회들의 모범에 따라) ‘교리와 예배와 권징과 교회정치’에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국이 단행할 ‘종교개혁’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 각자 처한 위치와 소명의 자리에서 순수하게, 참으로, 변함없이 노력하겠다.”고 했다. 정성호,『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들』, 320 참조.
45) 총회의 소집과 회집 자체는 당시의 정치적 영향이 충분히 반영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회 중 신학자들의 표현이 자유로웠으며, 어떤 제지를 받은 것이 없었”(R. Letham,『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 73.)을 정도로 자유롭고 경건한 분위기 가운데서 이뤄진 총회의 논의의 지침과 결론은 항상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함에 있었다.
46) David W. Hall, “Jus Divinum Regiminis Ecclesiastici” , 11-6.
47) 앞의 책, 11.
48) G. Gillespie, Aaron’s Rod Blossoming (repr. Harrisonburg, VA: Sprinkle Publications, 1985), 75-6.
49) David W. Hall, 12.
50) 앞의 책, 13.
51) 당시 의회의 의원들 가운데 3명의 에라스투스주의자들 외에도 상당수의 의원들이 이 견해를 지지했었기에,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자유로운 토론의 분위기와는 달리 의회는 에라스투스주의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지배적이었다.
52) 앞의 책, 16-7 참조.
53) ‘공예배’와 ‘장로교회 정치형태’에 관한 지침이 1643년과 1644년 사이에 작성되고, 그보다 나중인 1646년과 1647년에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이 작성되었지만, 1643년의 ‘엄숙 동맹과 언약’ 1조에서 명시하고 있는바와 같이 처음부터 모든 논의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모범을 따라” 행하는 것이었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대해 쓴 Mitchell, Alexander Ferrier의 “the Westminster Assembly, it’s history and standards”, (Philadelphia: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1884), 180쪽의 엄숙 동맹의 체결 과정에 있었던 스코틀랜드 총대들의 도착과 관련한 잉글랜드 의회의 명령서의 문구(“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일치할 수 있는”)에 대한 설명에도 잘 나타나 있다. 바로 그러한 맥락이 유스 디비눔에서 더욱 분명하게 ‘공예배’와 ‘장로교회 정치형태’로 연계되어 다뤄진다. 참고로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유스 디비눔과 관련한 논의는 1646년 4월 30일 Sess. 631차 회의에서부터 7월까지 논의되었는데, 의회는 에라스투스주의 외에 다른 교회정치에 대한 논의와 출판을 허락하지 않았다.
54) 특히 유스 디비눔 파트 Ⅱ의 제7장(125-131)을 보라.
55) A. F. Mitchell, The Westminster Assembly, 179.
56) 앞의 책, 362.
57) 앞의 책, 365.
58) 장종원 역, 『유스 디비눔』, 39.
59) 장종원 역, 『유스 디비눔』, 42.
60) 장종원 역, 『유스 디비눔』, 43.
61) 장종원 역, 『유스 디비눔』, 51.
62) “자연의 빛은 다소 도움을 준다”는 이 표현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1항의 “비록 자연의 빛과, 창조와 섭리의 사역들이 사람들로 변명할 수 없게 할 정도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와 능력을 매우 크게 나타낼지라도, 그러한 것들은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데 필연적인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주기에 충분하지 않다.”(정성호,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들』, 50.)는 문구의 맥락과 같다. 반면에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신앙에 이르는 선택의 경우, 인간은 자연의 빛을 정당히 사용한다는 이 조건이 미리 요구되었다는 것은, 마치 무엇이든지 선택에 의존하는 것처럼, 바르고(probus/vroom) 낮으며 겸손하여 영생에 적합하다.”(김영규, 『17세기 개혁신학』(미간행), 131.)고 하는 것이어서, 자연의 빛에 따라 완전하며 적합하다고 보는 점에서 유스 디비눔(Jus Divinum Regiminis Ecclesiastici)의 “자연의 빛”과는 전혀 다른 맥락이다.
63) 장종원 역, 『유스 디비눔』, 59.
64) 장종원 역, 『유스 디비눔』, 61.
65) 장종원 역, 『유스 디비눔』, 125-31.
66) 장종원 역, 『유스 디비눔』, 125.
67) 이러한 유스 디비눔의 언급은, 예배 자체의 요소 대한 것이며, 웨스트민스터 공예배지침에 포함되어 있는 결혼, 장례, 병자의 심방, 공적인 금식 등은 다소 부수적인 요소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68) 장종원 역, 『유스 디비눔』, 126.
69) 정성호,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들』, 91.
70) 장종원 역, 『유스 디비눔』, 126-7.
71) 유스 디비눔에서는 시편 찬양에 대해 구체적이고 상세한 언급이 생략되어 있는데, 이는 웨스트민스터 공예배지침에서 시편 찬송에 대한 주제를 맨 마지막에 짤막하게 다루는 취지와 같은 취지로 보인다. 즉 당시에 장로교도들 가운데서 예배 때에 부르는 찬송으로서 시편찬송 외에 다른 찬송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72) 장종원 역, 『유스 디비눔』, 127-8.
73) 장종원 역, 『유스 디비눔』, 129.
74) 장종원 역, 『유스 디비눔』, 129-31.
75) 장종원 역, 『유스 디비눔』, 35.
76) 앞의 책, 118-9.
77) 앞의 책, 125.
78) 앞의 책, 126-9.
79) 마찬가지로 17세기 초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신학자 William Ames(1576-1633)도 “THE MARROW OF SACRED DIVINITY.”(London, 1639) 2권 13장(p. 211)에서 “제정된 예배에 관하여”(of Instituted worship) 이른 “예배는 씨(種)에 의존하거나, 하나님의 본성, 혹은 하나님의 창조로 인해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에 달려 있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가장 자유로운 제정에 의존한다.”고 하여, 예배가 하나님의 자유로운 제정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하나님의 권위(Divine Right) 가운데서 주어진 것임을 밝히고 있다. 즉 Ames 외에도 Thomas Cartwright, William Perkins, John Preston 등의 가르침 가운데 있었던 케임브리지 대학의 학풍에서부터 이미 하나님의 법(Jus Divinum), 즉 신적권위(Divine Right)의 맥락이 공적으로 제정된 예배에 대한 이해 가운데 전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80)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는 다양한 교회정치와 정치적 배경 가운데서 이뤄진 일종의 Ecumenical 회의의 역사였다. 다만 현대의 Ecumenical 회의와 달리, 에라스투스주의, 독립교회주의, 장로교회주의 등 각각의 교회정치와 신학이 성경에 근거하여 유일한 것(장로교회정치로)으로 일치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며, 성경에 근거하는 유일한 의미의 신학과 교회정치가 바로 장로교회 정치인 것을 잘 결론지은 역사였다.
* 이는 본인의 책 『21세기 개혁신학의 방향』 (서울: CCP, 2018), 제 7장의 일부이다. 7장 전체와 정암의 교회론을 다룬 5장, 그리고 또 다른 책인 『한국 교회가 나아 갈 길』 (서울: CCP, 2018)도 읽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